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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젊었을 때, 힘든 시기를 보낼 때마다 작고하신 어머니께서 자주 해주셨던 말씀이었다. 그 시절, 대부분의 가정이 빈곤에 허덕였지만, 우리 집은 유독 더 가난했다. 8남매를 둔 어머니는 36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자식들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공부는 사치였다. 결국 나는 중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가구 공장에서 일하며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 했다.   이른 아침 공장으로 향하는 길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의 심정과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중학교 시절 좋아했던 여자애가 여고생이 되어 단정한 교복 차림에 자주색 책가방을 들고 등교하는 모습과, 공장으로 향하는 남루한 작업복 차림의 내 모습이 중간에서 마주칠 때였다. 그 순간이 너무 창피해서 매일 다니던 길 대신 20분을 더 걸어 우회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를 동생보다 더 아껴주던 친구의 누나가 “남자라면 최소한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한다”고 설득하며 야간 고등학교 등록금을 내주었다. 동창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나는 비로소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그때부터 생계를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다. 구두닦이, 신문팔이,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느 날, 혼담이 오가던 둘째 누나가 나를 불러 앉혔다. “너 때문에 시집을 못 가게 생겼다.” 울먹이는 누나는 나를 부둥켜안고 하소연했다. 명동 한복판에서 신문을 팔던 내 모습을 매형 될 사람이 보았던 것이다.   이후, 작은 무역회사에서 사환으로 일하며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준비했지만, 끝내 세 과목을 치르지 못한 채 군 입대를 해야 했다. 대학생은 입영 연기가 가능했지만, 고등학생은 예외였다. 제대 후 다행히 손해보험회사에 취직했지만, 고졸 출신은 진급이 늦었다. 나보다 늦게 입사한 대졸 후배가 내 상사가 되었고, 평생 과장 자리에서 머무는 선배들을 보며 좌절감을 느꼈다. 학벌과 학위가 전부인 회사 시스템에 절망했고, 결국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주경야독 끝에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는 데 10년이 걸렸다.   그 시절, 야간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1시가 넘었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 그 때 얻은 위장병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어머니 말씀은 단순히 고생을 감수하라는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젊을 때의 고생은 훗날 발전을 위한 밑거름이 되니 받아들이라는 의미였고, 고진감래의 순간이 올 것이니 견디라는 격려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어머니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마다 듣기 싫었다. 맹자는 “걱정과 어려움이 나를 살게 하고, 안락함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고 말했다. 이는 고난 속에서도 좌절하지 말고, 안락할 때 방탕하지 말라는 경고다.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는 지혜에 대한 연구를 진행한 결과, 역경을 극복한 사람과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더욱 지혜로우며, 특히 지혜로운 사람일수록 인생의 어두운 면을 일찍 경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젊을 때의 어려움은 우리를 성장시키고 발전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아니겠는가.   주변 사람들은 나를 보고 집념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이만큼 살아가는 것도 그때의 경험이 밑거름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지금 당장은 힘들고 고달프더라도, 젊은 시절의 고생이 결국 성공의 기회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이진용 / 수필가열린광장 고생 고등학교 졸업 야간 고등학교 어머니 말씀

2025-03-23

[삶의 뜨락에서] 천연두(smallpox)

한국 전쟁 전후에만 해도 어린 내가 한길을 보행할 때 가끔 천연두(smallpox)라는 전염병을 심하게 앓고 난 사람들의 얼굴에 곰보 자국이라는 흉터를 볼 수 있었다. 이 천연두라는 전염병은 그 전염성이 대단히 높은 데가 사망률이 30% 이상이 되고 심한 열과 함께 온몸에 발진이 나타나면서 가려움증 결과로 피부에 흉터를 남기는 아주 심한 전염성 고질병이다.   어머니 말씀을 들어보면 내 어머니도 어릴 때 천연두 예방 주사를 채 맞지 못한 상태에서 그 병이 전염되어서 고열과 발진으로 고생하시다가 다행히 피부에 과한 흉터가 없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머니와 한 동네 살던 어머니의 사촌 동생은 천연두를 앓던 중에 고열로 이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께서는 그가 퍽이나 사랑하고 아끼던 사촌 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셨다.   구한말 한국 여성에게 의사가 되는 길이 열려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의 의료선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화대학 영문과 졸업한 후에 다시 세브란스 간호 양성소에 입학하여 간호 학생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아주 어려서부터 배움에 영특하셔서 캐나다 선교사가 주는 장학금으로 중국 옌칭대(연경대 후에 북경대)에서 의예과를 마친 후 토론토 대학원에 진학하여 예방의학을 전공하셨다.   그 후에도 개량식 한복을 입으시고 세상 여러 곳을 두루 다니면서 가끔 외국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도 주저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셔서 어느 과목에나 일호를 하셨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부모님들이 자식을 여러 명씩 출산해서 기르는 풍조가 있었는데 이것은 출산한 아기들이 모두 잘 성장하지 못하고 일찍 죽는 예가 많았고 우리나라 신생아 사망률이 상당히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간에서 자식 농사는 반타작 농사라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어머니들은 아기를 밴 후 자기 뱃속에서 아홉 달 긴 시간을 키워서 세상에 내어놓은 어린 것이 주어진 그의 삶을 다 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보아야 했고, 내 어머니는 천연두 예방 주사가 항간에 이미 나와 있는데도 그 효험을 미처 알지 못한 부모들이 서둘러 예방 접종하지 못하여 심한 열병을 앓다가 숨진 사촌 동생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이 모두가 미리 예방함으로 회피할 수 있었던 것임을 매우 안타깝게 여기길 뿐만이 아니라 그 과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으로 삼고 그의 여생을 예방의학에 헌신하기로 작정하게 되었다고 하셨다.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어머니는 Miss Rothenburg라는 미국 간호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태화여자 사회관을 중심으로 서울을 위시하여 전국을 두루 다니시면서 부녀들의 위생 관념과 예방 교육에 온 힘을 다 기울이셨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어머니는 공중위생학위를 가진 한국인 최초의 전문 간호사로서 1959년 나이팅게일 기장을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를 통하여 받은 바가 있다. 내가 보아온 우리 어머니의 삶은 뤽 워렌(Rick Warren) 목사님의 저서에서처럼 한마디로 말해서 목적이 이끄는 삶 자체가 아닌가 생각된다. 황진수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smallpox 천연두 천연두 예방 어머니 말씀 우리나라 어머니들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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